[박재근의 행여나] "알고보면 우리는 한가족"...에버랜드 '지구마을' 이야기

박재근 승인 2022.03.05 21:33 | 최종 수정 2022.03.05 22:09 의견 0
1980년대 지구마을 입구(사진=에버랜드 유튜브 캡쳐)

코로나19 사태 직전만 해도, 비행기 티켓 하나와 여권 한 장 들고 베낭 하나 맨 채로 해외여행을 떠나는 게 가능했다.

"이건 말도 안 돼!"라는 비명이 튀어나올 정도로 저렴한 비행기 티켓이 인터넷 상에 풀리는 경우, 그 티켓의 목적지와 유효기간에 맞춰 즉흥적으로 해외여행 계획을 짜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그 정도로 해외여행 떠나기가 간편해졌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1980년대까지만 해도 일반인이 단순 관광이나 휴양 목적으로 여행을 떠나기란 쉽지 않았다. 경제적인 여유도 없었지만, 정부 차원에서 규제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어렵게 당국의 허가를 얻었다 해도, '반공 교육'을 받아야 한다거나 하는 등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냉전 시절이었던 탓에 불가피한 상황이었을 테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의 '해외 여행 욕구'를 간접적으로나마 충족해주는 시설이 있었다. 에버랜드, 아니, 당시 '자연농원'에서 운영하던 어트랙션(놀이기구) '지구마을'이었다.

2010년대 지구마을 입구 야경(사진=에버랜드 공식 블로그 '위드에버랜드')

야외 시설물은 아니고, 별도의 건물 내에 설치됐던 이 어트랙션은 기본적으로 배를 타고 전 세계를 한 바퀴 둘러본다는 콘셉트였다. 탑승했던 지점으로 돌아오기까지 짧으면 10분, 길게는 15분 정도 걸렸던 이 배를 타면, 세계의 민속 의상을 입은 인형들과 해당 나라의 명소를 재현해놓은 배경이 좌우로 펼쳐졌다.

그리고 '창작동요의 아버지' 윤석중 선생이 가사를 붙였다는 주제가가 흘러나왔다.

세계를 돌고 돌면 별처럼 많은 형제
알고 보면 우리는 지구마을 한 가족
어제 별은 조상 별 오늘 별은 가족 별
내일 별은 자손 별 대대 손손 밝은 별
세계를 돌고 돌면 별처럼 많은 형제
알고 보면 우리는 지구마을 한가족

대한민국을 표현한 '지구마을' 인테리어(사진=에버랜드 공식 블로그 '위드에버랜드')

해외여행에 대한 욕구를 '대리만족' 시켜주던 이 어트랙션은 2015년부터 운행이 중단됐고, 다음해인 2016년 철거가 완료돼 완전히 사라졌다.

나름 한 시대를 풍미한 걸 넘어 '자연농원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시설이기에, 반대 여론이 상당히 높았다. "수리비가 너무 많이 드는 게 문제라면, 차라리 철거한 뒤 다시 지어달라"는 요청도 나왔다. 하지만 예전과 같은 인기를 끌 거라고 확신하기 어려웠을까? 결국 에버랜드는 '지구마을'을 다시 짓지 않았다.

가만히 앉아서 세계여행 콘셉트를 즐길 수 있었던 어트랙션.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실내가 그리워질 때 찾거나, 하루종일 신나게 놀고 나서 체력적으로 지칠 때 마지막 순서를 장식했던 그 시설. 이렇게 한국 테마파크 역사의 뒷편으로 넘어갔다.

철거 무렵의 지구마을 입구(사진=에버랜드 공식 블로그 '위드에버랜드')

세계를 돌고 돌면 별처럼 많은 형제
알고 보면 우리는 지구마을 한 가족

'지구마을' 주제가 중에서도, 유난히 이 가사가 귓가에 맴도는 요즘이다.

과거에 대한 아련한 추억, 자유로운 해외여행을 향한 갈증도 이유이긴 하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최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소식이 연일 뉴스를 뒤덮고 있다. 매일 누군가 목숨을 잃고, 누군가의 집과 직장이 사라진다는 소식이 이어진다. 행여나 원자력 관련 시설이 파괴되진 않을지, 제3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지진 않을지 노심초사하게 된다.

미얀마 사태는 또 어떤가. 군부 쿠데타로 시작됐던 이 사태는 내전으로 번지고 말았다.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미얀마 현지인들은 제대로 치료 받지도, 보건 관련 물품을 지급 받지도 못하고 있다. 현지인 뿐 아니라, 유학차·업무차 우리나라로 들어와 있는 국내 미얀마인들도 매일 가슴을 졸이며 사는 처지가 됐다.

몇몇 기업의 사회공헌 담당자를 만나 우크라이나와 미얀마 관련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서 '국내에 체류 중인 두 나라 사람들을 도울 방법이 없겠느냐'고 물었다. 대답이 신통치 않다. 동남아 또는 동유럽 쪽에 진출한 기업의 경우 더 그랬다. 현지 권력자들에게 간접적으로나마 맞서는 듯한 모양새를 보였다가 사업에 타격을 입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는 심정이 이해는 된다.

10여년 전엔 'CSR'을 강조하던 기업들. 이젠 'ESG'를 내세우고 있다. 뭔가 재무적 성과를 더 높이기 위한 외침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기업의 사회활동이라는 측면에서, '별처럼 많은 형제', '지구마을 한 가족'들에 대한 관심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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