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11:33 (목)

울진 '망양정', '관동팔경'의 명성은 여전한가?

  • 기자명 양혁진 (anywhere@travel-life.co.kr)
글씨크기

첫인상은 비단 사람에게만 국한 되는 건 아니다.

어떤 이는 어린 시절 잘 못 먹은 번데기에 평생 트라우마를 갖고 살아가고,

?또 누군가는 남들 다 좋다는 휴양지에서 소나기와 돌풍을 얻어맞아 엉망인 기억을 떨쳐내지 못한다.

여행지의 첫 인상은 어쩌면 이보다 더 간단하고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기억 속에 남는다.

새벽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청송 주산지와 대낮의 열기가 가득한 그곳이 같을 수 없고,

?태풍 주의보가 내려져 사람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제주용머리 해안의 낙조가 수학여행 시즌에

학생들로 발 디딜 틈새가 없는 때의 그것과 같을 리가 없다.

그래서 망양정은 좋았다. 날씨도 선선했고,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왕피천 제방길과 바닷가도 산책하기에 너무나 고요하고 좋아보였다.

아무도 없는 곳은 대체로 모든 것이 좋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든 곳이 그런 건 아니다.

홍콩의 야경을 보며 그 왁자지껄한 침사추이에 혼자 있다고 생각하면 좋을 게 뭐가 있겠는가.

산속의 독거노인은 자연인이지만, 도시속의 자연인은 독거노인일 뿐이다.

망양정에 오르니 관동팔경이 자동으로 떠오른다.

관동팔경을 입으로 소리 내니 관동별곡이 따라온다.

관동별곡에 대해 많은 걸 알진 못하나 정철의 삶을 생각해보면 더 알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정제되었으나 의도가 다분한 문인의 글보다 팔도 유람하는 한량의 스산함을 좋아하는 취향인데다,

?그 많고 많은 정나미 떨어지는 조선의 관료 중에서도 하필 선조와 연관된 인물이기 때문이다.

정철을 생각해서인지 이 시원한 풍경을 바라보는 마음이 가볍지 않다.

아마도 조선시대 이곳에서 '좋구나'를 연발하는 사람들은 정철 같은 지체 높은 양반들일 것이고,

?평민은 저 멀리 보이는 바다에서 구슬땀을 흘리며 그물을 끌어올리고 있을 터였다.

이게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는 것인가’ 라는 생각마저 든다.

그래서 사전 지식을 버리고 왕피천이 흘러드는 울진 바다만 바라보려 했으나, 어쩔 수 없다는 듯 다시 정철이 소환된다.

?유유자적함과 아름다움을 보는 힘, 이것은 동시대에 권력을 가진다는 것과는 물과 기름의 관계일 것이다.

문인과 정치인 중 어느 것도 놓지 않으려 한 그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하는 그저 재능 있고 욕심 많은 캐릭터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이런 소회도 아까울 정도로 그저 권력의 모든 종속변수로 그 많은 글을 동원한 것일까.

그 이유야 어찌됐건 이곳 망양정에서 다시 떠올린 그는 정치인이라는 기름이 대부분 지워지고 문인이라는 물만 남았으니 성공한 것처럼 보인다.

우리 대부분이 교과서의 정철을 접하고 공부했어야 하지 않는가.

한 인간의 삶을 제대로 평가하지 않고 그가 남긴 결과물의 우수성만으로 찬사를 보내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

어쩌면 사람 뿐 만이 아니라 피라미드, 만리장성, 타지마할 등 우리가 감탄하는 모든 왕조의 유물이 그러하지 않을까.

무슨 이유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피와 눈물이 갈려서 없어진 것일까.

알 수 없다. 그저 알 수 있는 것이라고는 '어쩌다 이 좋은 곳에서 정철이 떠올라 이런 푸념들을 늘어놓고 있는 것일까' 하는 것뿐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트래블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