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0:45 (금)

[다시, 걷다] (11) 동해안 해파랑34번길, ‘섞어찌개’ 같은 묵호항 산책길

  • 기자명 양혁진 (anywhere@travel-life.co.kr)
글씨크기

묵호라는 동네. 강릉이나 양양과 비교하면, '지리적으로 살짝 애매하구나'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든다. 삼척, 울진 이런 곳들도 마찬가지지만.

도시 거주자의 입장에서 여행지를 바라본다는 게 썩 내키진 않지만, 어쩔 수 없다. 현실이 그러니.

강릉 같은 경우는, 주말 동안 '잠깐의 일탈'을 꿈꾸는 도시인들이 별 부담 없이 계획을 세울 수 있다. KTX 표를 예약하고 나면, 이미 여행은 절반쯤 성공이다.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2시간 남짓 앉아있으면 강릉에 도착하니깐.

양양도 마찬가지다. 서울-양양 고속도로를 신나게 달리다 보면, 어느 새 끊임 없이 터널이 나온다. "아니, 이 터널들은 도대체 언제쯤 끝나는 거야... 어라? 드디어 끝났네?" 싶으면 바로 양양이다. 교통정체만 없다면, 역시 2시간 반 남짓이면 도착한다.

하지만 목적지가 동해시라면 이야기가 좀 달라진다. 서울에서 한 번에 가는 KTX가 있긴 하지만, 운행횟수가 많지 않다. 평일엔 하루 4회, 주말은 하루 6회. 그나마 2회는 서울역이 아닌 청량리역에서 출발한다. 기차표를 예약하는 등의 계획을 미리 세워놓지 않은 채, "주말에 바다나 보러 갈까?"라며 갑자기 불쑥 일정을 잡긴 다소 부담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인연일까. 최근 기억을 되감아보면 동해 묵호항이 자주 뜰채에 걸려든다.

딱히 별다른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동해 바다를 보고 싶어, '조금만 더'를 되뇌이다 보면, 어느새 묵호항에 밀려 와 있다.

코로나 사태가 계속 전국을 뒤덮었다곤 하지만, 육로도, 철로도, 바닷길도 사실 막히진 않았다. 그런데도 묵호항 여객선 터미널의 문이 굳게 닫힌 건 무슨 탓일까.

여객선 터미널 앞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나면, 가장 먼저 보이는 건 어린왕자 벽화다.

어쩜, 사막에 사는 친구가 멀리도 왔구나 생각하며 걷다 보면, 묵호등대 인근에 새로 들어선 '도째비골 스카이밸리'가 모습을 드러낸다.

왜 도깨비가 아닌 도째비인가 싶었는데, 알고보니 이 쪽 동네에서 도깨비를 일컫는 사투리라나.

바다위에 길을 낸 해랑전망대도 보인다.

묵호등대까지 포함해 세 곳을 묶으면, 꽤 근사한 반나절 구경거리가 된다.

"요즘은 어딜 가도 볼거리가 비슷비슷해"

이런 불평 또는 비판 한 마디 툭 던지는 거야 누군들 못할까.

하지만, 연인 또는 가족과 함께 즐길만한 여행 콘텐츠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달리 떠오르는 게 없어 고심했을 지자체의 고충도 느껴진다.

'섞어찌개'를 생각해보자. 그 자체가 나쁜 메뉴는 아니지 않는가. 문제는 맛이다.

관광객들로 들끓는 이곳을 지나면 비로소 해파랑길이라 부를만한 풍경이 펼쳐진다.

그 풍경은 바다와 길을 제외하면 '별게 없음'을 의미한다.

바다를 따라가는 평지라, 산책하는 기분으로 걷긴 너무 좋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스팔트 포장길이라 오가는 차들이 몰입을 방해한다는 것.

뭐 그 정도야 어떠랴. 길지 않은 산책길은 대진마을에서 멎는다.

'서울 경복궁의 정동방은 이 곳 대진마을'이라니.

서울에서의 일상을 잊고 싶어 동해바다로 도망쳐 왔는데, 여기서도 '서울'을 굳이 떠올려야만 하는 건지...

아무튼 동해안의 이 작은 해변에도 겨울 서핑이 이어진다.

길어진 그림자, 바람에 날리는 텐트, 아무도 없는 백사장.

겨울 바다 여행의 모습들이 슬슬 제자리를 찾아간다.

마음 내키는 방향으로, 마음 내키는(또는 체력이 허락하는) 시간만큼 걷다가 커피 한 잔 마시며 쉰 뒤, 택시타고 되돌아오기.

외국에서나 국내에서나 똑같이 적용되기 시작한 이 여행 루틴이 점점 마음에 들어진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저작권자 © 트래블라이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