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8 15:00 (목)

마산 만날재, 누군가가 간절히 그리워지면...

  • 기자명 박재근 (withjkon@travel-lif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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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가난했다. '홀어머니와 동생을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압박감이 집안의 장녀였던 그녀를 항상 짓눌렀다.

다만, 가족 누구도 그녀에게 "우릴 먹여 살리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저 맏딸이, 언니·누나가 행복하길 바랄 뿐이었다. 스무살도 채 안 된 나이. 책임감을 짊어지기엔 그녀가 너무 어리기도 했다.

그녀에게 혼사 제안이 들어왔을 때에도, 가족들은 모두 반대했다. 상대 집안에 돈이 많다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었다. 다만 그 집 아들이 심한 장애를 앓고 있다는 게 걸렸다. 사랑하는 딸을, 누나·언니를 그 집으로 보내긴 너무나도 꺼림칙했다.

그럼에도 선뜻 "결혼하겠다"고 나선 건 그녀였다. '나 하나 희생하면 모두가 행복하고 편안해지지 않을까'라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감당할 수 있는 결혼인지'를 따지기엔, 그녀는 너무 착하고 순수했다.

부잣집 며느리가 된 그녀. 각오야 했겠지만, 시집살이는 예상보다 더 고되고 서러웠다. '돈으로 성사된 결혼'이었기 때문일까? 시댁 식구들은 그녀를 며느리가 아닌, 하녀로 여기는 듯했다. 사소한 실수라도 발생하는 날에는 집안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그나마 남편이라도 다가와서 토닥여준다면 위로가 됐으련만, 그런 걸 기대하긴 어려웠다.

시집온 지 몇 년이 지났을까. 친정을 방문할 기회가 어렵게 찾아왔다. 그 짧은 외출 조차도 중증 장애인인 남편을 동반해야만 했다. 가파른 고갯길을 넘어가야 하는 여정이었다.

고갯마루를 넘어가려는 순간, 남편은 그녀에게 "여기서 기다릴테니, 혼자 가서 친정 식구들을 보고 오라"고 했다. '육체적으로 힘들었나? 처가를 방문하기 쑥쓰럽나? 아니면 날 배려하는 건가...' 여러 생각을 하면서도, 그녀는 친정을 향해 홀로 발걸음을 옮겼다.

오랜만에 친정 식구들을 만나고 온 그녀. 고갯마루로 돌아오는 순간까지도 눈물은 마르지 않았다. 고갯마루에서 남편을 발견한 그녀는 다시 눈물을 쏟아야 했다. 기다리겠다던 남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해서인지, 그녀가 자신을 떠나 앞으로 행복하기 살기를 바라는 마음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상황에서도 시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던 그녀. 시집살이는 그 전보다 더욱 혹독해졌다.

일상에 지쳐있던 어느 날, 그녀의 발걸음은 무의식 중에 친정 마을로 향하는 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마침 바로 그 때, 맏딸을 그리워하던 그녀의 친정어머니도 그 고개에 올라, 딸아이의 시댁을 향해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우연히 만난 모녀는 부둥켜 안은 채 하염 없이 울기만 했다. 이 날이 음력 8월 17일이라 전해진다.

사연을 알게 된 마산 사람들은 매년 그 날이 오면, 그 고개에서 '만난'다. 전설은 슬프지만, 그리운 사람들을 만난다는 건 항상 기쁜 일이다. 음식을 나눠먹으며 축제를 벌인다.

이렇게 슬프면서도 애틋한 이야기는 지명으로서의 '만날재' 또는 '만날고개', 지역 축제명인 '만날제(祭)' 등의 유래가 됐다. 이른바 '만날재 전설'이다.

통합 창원시가 탄생한 지 벌써 10년 넘는 시간이 지났건만, 구. 마산시 지역은 여전히 '창원'이 아닌 '마산'으로 불러야만 할 것 같다.

마산 사람들이 창원과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다는, 다시 말해 '창원 사람'이라고 불리길 거부하고, '마산 사람'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다.

하지만 그런 내용을 모르는 여행자가 보더라도 창원과 마산의 분위기는 너무나도 다르다. 창원의 이미지를 넓은 평야에 쫙 뻗은 대로 등으로 표현한다면, 마산은 바다와 항구, 산과 언덕, 이를 관통하는 '산복도로'등으로 나타낼 수 있다. 창원이 계획도시, 산업도시라면 마산은 오래된 항구도시라는 느낌이 확 다가온다.

그래서일까. '만날재'를 소개할 때에도 '창원 만날재'가 아닌, '마산 만날재'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만날재는 고개, 그것도 경사가 상당히 가파른 고개다. 그 고개의 일부 구간을 공원으로 꾸몄다. 바로 '만날근린공원'이다. 공원이라곤 하지만, 누구나 들러 가볍게 한 바퀴 돌고 갈 수 있는 느낌은 아니다. 아무래도 경사가 있다 보니...

고개를 오르다가 뒤를 돌아보면, 마산 앞바다가 보이는 이 전경... 만날재가 얼마나 가파른지를 보여주는 증거일까.

일상에 찌들어있던 그녀, 딸이 그리워 고개에 올랐던 그녀의 어머니, 고개 정상에서 스스로 세상을 등진 그녀의 남편... 바다를 내려다 보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슬프면서도 애틋한 '만날재 전설'이 없었다면, '공기 맑고 바다 경치 좋긴 하지만, 그게 전부인 평범한 등산로'가 됐을 뻔한 만날근린공원. 평범한 장소에 '스토리'가 입히면서 특별한 공간이 됐다.

'만날재 전설'이 아무래도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구전 설화'다 보니, 상세한 내용은 일부 달라지기도 한다. 예컨대, '사실 남편은 그녀를 오래전부터 연모해 왔다'는 따위의 내용은 문헌 상의 기록이나, 마산 사람들 사이에서 전해져오는 이야기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내용이다.

하지만 뭐 어떤가 싶다. 큰 줄기는 유지되지만, 세세한 내용이 조금 달라지기도 하는... 구전 설화라는 게 다 그렇지 않은가.

꼭 '마산 만날재'가 아니어도 좋다. 누군가가 간절히 그리워지면, 평소 그 사람과 접점이 있던 장소를 한 번 쯤 찾아가 보자. 기대하지도 않았던 그리운 얼굴을 우연히 만날 수도 있을 테니.

그리고 소중한 사람이 곁에 있다면, 그 사람과의 추억을 쌓을 만한 '또다른 만날재'를 만들어보는 건 어떨까. 물론 그 전에, '마산 만날재'를 한 번 쯤은 찾아보는 것도 괜찮겠다. 만날재를 둘러보며, 한 마디 해보는 거다. "참 애틋한 이야기야, 그치? 우리도 서로 보고 싶을 때, 언제든 가서 기다릴 수 있는, 우리만의 '만날재'를 한 번 만들어보는 게 어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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