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세부(上), ‘그대가 불행하다고 느낀다면…’

양혁진 승인 2021.05.19 12:31 | 최종 수정 2021.05.30 16:24 의견 0

해외여행 자율화가 남 얘기처럼 느껴지던 까마득한 시절, 인도로 여행을 떠난 친구가 있었다. 지금도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면 시도조차 해보기 힘든 한 달 동안의 배낭여행이었다.

여행이 끝난 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도착 후 하루 만에 난 그곳을 떠나고 싶었다. 일주일이 되자 모든 것에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한 달이 되자 난 그곳을 떠나기 싫어졌다.”

단순한 적응의 문제는 아닌 듯싶어 자세한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그는 가봐야 안다는 말만 되풀이 했다. 물론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도 난 인도를 가보지 못했다. 그럴 리도 없겠지만 한 달 배낭을 싼다면 그가 말한 것을 느끼고 돌아올 수 있을까.

공항을 빠져나오자마자 열대기후 특유의 후덥지근함이 확 불어온다. 자정이 되어가는 시간인데도 한국의 열대야 정도는 장난 같다. 대형리조트의 차량이 몇 번 움직이자 비행기에 같이 탔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빠져나간 듯하다.

세부로 오는 관광객 95%는 막탄 섬의 리조트로 향한다. 그곳에는 호핑과 다이빙을 포함한 모든 액티비티가 있고, 리조트 안에는 모든 편의 시설이 들어차 있어 밖으로 나올 필요조차 없다. 마지막 날 세부시티에 있는 대형 몰에서 쇼핑을 하고 공항으로 이동하는 게 가장 보편적인 여행코스다.

사진=웨일즈다이브 제공

예전에 어떤 친구는 우울하다는 생각이 들면 잠이 부족하지 않는지 배가 고프지 않는지를 확인하라고 했다. 그래도 우울하다면 우울한 게 맞는다고. 굳이 버트런드 러셀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현대 사회는 행복을 방해하는 온갖 복잡다단한 방해물들을 개인에게 던져준다.

‘행복의 정복’은 커녕 불행으로부터 도망치기도 급급하다. 시름에 빠진 사람에게 여행을 가라고 충고하는 것은 그래서 현명하다. ​낯선 상황, 새로운 풍경은 잠시나마 고민에 썩어가는 머리를 구해낸다.

사진=NHN여행박사 제공

세부는 해양 액티비티의 천국이라고 한다. 섬들을 옮겨 다니며(그래서 이름이 호핑이다) 수영과 다이빙을 하고, 고래상어 투어를 하며, 폭포에서 뛰어내리기도 한다. 물에 발조차 담그기가 싫다면 노을이 지는 바다를 배위에서 볼 수 있는 유람선 코스도 있다. 미리 준비해가지 않아도 현지의 업체들이 수두룩하다. 무엇보다 필리핀 액티비티 여행의 가장 큰 경쟁력은 ‘가성비’다.

​하루 종일 투어를 도와준 진행요원에게 주는 팁이 100페소(약 2,300원) 정도니 더 이상 설명할게 없다. 땅에서 보는 바다는 예쁘지 않아, 진정한 필리핀의 에메랄드 바다는 배를 타고 나가야 한다.

3박5일이나 4박6일 코스면 위의 액티비티만 소화해도 체력이 고갈될 정도라고 한다. 잡다한 생각을 할 여유가 있는가? 저녁엔 한잔 하고 마사지 한번 받으면 자동으로 지쳐 쓰러지게 된다.

이런 것들로 기분전환이 되진 않는다고? 그렇다면 다른 의미의 필리핀 여행을 떠나야 한다.
리조트의 섬 막탄을 떠나 세부시티로 간다.

흰 눈 사이로 썰매를 탈순 없지만, 모든 호텔 로비에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남반구를 가본 적이 없어 이 더운 날씨에 크리스마스라니 기분이 묘하다. 생각해보면 남반구용 산타 패션은 따로 있을까, 반바지라도 입어야 하지 않을까.

[(下)편에서 계속]

[편집자 주]

이 기사는 코로나19 사태 직전인 2019. 12. 12. 작성된 글이며, 서비스 개편 과정에서 누락된 것을 2021. 5. 19. 복구한 것입니다.

코로나 이전 해외여행의 추억을 되새기고, 언젠가 다시 누리게 될 자유로운 여행을 상상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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