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16:44 (금)

[다시, 걷다] (5) 동해안 해파랑 18번길(下), 마침표 대신 쉼표만 가득한 해안길

  • 기자명 양혁진 (anywhere@travel-lif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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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 길을 걷는다는 건 인생이라는 걸음에서의 멈춤을 뜻한다.

걷기 시작하는 순간에는 현재의 고민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끌어안고 있지만, 어느 순간 무념무상의 걸음 속에서 수평선과 모래알 그리고 갯바위를 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걸음 속에서 인생이 멈춰진다는 건 넌센스가 아니라 삶의 지혜다.

18번 길의 가장 큰 장점은 전국적인 지명도를 가진 명소가 없다는 것.

사람들로 붐비는 곳도 없고, 주변 환경에 비해 이질적인 시설물도 보이지 않는다.

기껏 사람이 모여드는 곳이라야 바닷가에 세워진 전망대 정도.

이런 곳은 해안도로를 드라이브 하는 사람들에게 양보해도 충분할 것 같다.

초소만 남은 해안철책들이 세월의 흔적을 대변한다.

아니면 이른바 ‘추억 팔이’로 일부러 남겨둔 것인지도 모르겠다.

7-80년대 해안선엔 일몰 후 일출 때까지 출입이 금지됐었다.

“18시 이후 허가 없이 해안가 접근 시 발포 함 - 중대장 백”

이런 살벌한 안내판이 곳곳에 붙어 있곤 했다.

실제 그 시간에 철책을 넘어서 사격을 받았다는 얘기는 듣지 못한 것 같은데, 아마도 바닷가 출신이어도 기억에 가물거릴 옛 이야기들이다.

사람들이 들락거리지 못하니 아름다운 백사장의 원형 그대로 보조되었을 것 같지만, 기억 속에선 그렇지 않다.

주왕산의 제1폭포를 걷다보면 투명하게 느껴지는 계곡물에 감탄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물론 출입이 금지되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리되고 있다는 의미가 더 크다. 내버려둔다고 깨끗한 것은 아니다.

바닷가는 조금 다르다. 해안가는 무언가 끊임없이 밀려온다. 그것이 쓰레기이건 해초류이건 말이다.

우리가 흔히 푸른 바다라고 할 때 푸른은 바다자체의 색이라기 보단 바닥면의 색이라고 보는 게 맞다.

그리고 태풍은 한 번씩 이런 바닷물을 바닥에서 상층까지 한 번에 뒤집어 놓는다.

따라서 예전의 바다가 지금보다 더 깨끗했다는 건 뭔가 기억에 맞지 않는다.

해파랑 18번 길은 내 기억속의 어느 바닷가 길보다 깨끗했다.

그곳엔 뒤엉킨 해초도, 밀려온 쓰레기도, 그리고 비린내도 없다.

걷는다는 건 되돌아온다는 걸 의미한다.

돌아오지 않는 여행을 떠나는 사람은 집시와 죽는 자일 뿐일 터.

돌아옴을 전제하고 있기에 여행엔 설렘과 함께 보호받는 느낌이 담긴다.

하지만 누구나 한 번은 돌아오지 못할 여행을 떠나야 한다.

집시와 죽는 자가 어디로 떠나는지 알 수는 없지만 해파랑 길을 걸은 당신,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는 알고 있을 것이다.

물론 차를 세워두고, 걷기 시작한 곳이다.

이런 시골에 콜택시 앱이 돌아가냐고?

너무 잘 돌아간다. 택시 기사님도 "해파랑길을 걷다가 출발지로 돌아가려는 손님들의 호출을 자주 받는 편"이라고 말한다.몇 시간을 걸어갔지만, 택시로 컴백하는 그 순간은 허무할 정도로 짧다.

그런 게 인생 아니겠는가. 그래서 해파랑 18번 길 위에 멈춰선 지점은 마침표가 아니라 짧은 쉼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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